溫故知新 옛 가르침에서 오늘의 깨달음, 온고
"나"라는 것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몸도 성격도 아니라면, 내가 사랑받는다고 할 때의 그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이 "나"는 어디에 있는가 — 몸에도 영혼에도 있지 않다면?
파스칼은 짓궂은 실험을 던진다. 누군가 나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면, 그건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곧 사라질 얼굴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의 판단력을 사랑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 그 능력을 잃으면 사랑도 사라질 테니. 그렇다면 몸의 성질도 마음의 능력도 아닌 "나 자체"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는 우리가 실체 없는 것을 사랑하며 산다고 꼬집는다. 이 물음은 갈라졌다. 흄은 그 "나"란 아예 없다고 했고, 칸트는 경험 뒤에 통일을 주는 "초월적 자아"를 가정했으며, 우파니샤드는 몸도 마음도 아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neti neti)" 참나를 가리켰다. 사랑받는 "나"의 정체는 지금도 붙잡히지 않는다.
이미지와 스펙으로 서로를 값매기는 시대에, 그 모든 것 아래 "나 자체"를 묻는 이 물음은 더 서늘하다.
📝나도 이 물음 앞에 서서
나는 이 물음이 얄궂으면서도 아프다. 누가 나를 사랑한다 할 때, 그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내 얼굴이나 능력이나 쓸모를 사랑하는 걸까. 그리고 그것들이 다 바래면, 남는 "나"는 무엇일까. 파스칼은 답을 주지 않고 나를 벼랑 끝에 세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붙잡히지 않는 그 "나"의 신비가 나를 함부로 규정하지 못하게 지켜주기도 한다. 나는 내가 무엇인지 다 알지 못한 채, 그럼에도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산다. 그 신비 앞에 나도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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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답의 박물관이 아니라 물음의 계보입니다. 원전은 모두 고대·근대 문헌(Public Domain)이며, 계보와 해석은 ONGO 100% 오리지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