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의 계보
하루 한 물음. 인류가 2천 년간 물어온 정전(正典)의 물음을 — 누가 처음 던졌고, 답이 어떻게 갈렸으며, 왜 아직 살아있는가. 답은 닫고, 당신의 답 한 칸만 엽니다.
너 자신을 알라
🧭 물음 모음
너 자신을 알라
나 자신을 아는 것이 모든 앎의 시작인가?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는가?
스스로 캐묻지 않는 삶은 정말 살 가치가 없는가?
내가 나임을 무엇으로 확신하는가?
모든 것을 의심해도 끝내 의심할 수 없는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가장 먼저 돌봐야 하는가?
재산과 명예보다 내 영혼을 먼저 돌보고 있는가?
남을 아는 것과 나를 아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남을 아는 것은 지혜이고, 나를 아는 것은 밝음인가?
내 안에는 몇 개의 나가 있는가?
내 안의 이성과 욕망은 하나의 마부와 두 마리 말처럼 다투는가?
하루에 몇 번 나를 돌아보아야 하는가?
날마다 나를 돌아보는 것으로 사람은 바로 서는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사람인가?
끊임없이 변하는 내가, 그래도 하나의 "나"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는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나는 정직하게 가르는가?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그것이 참된 앎인가?
나는 나에게 하나의 수수께끼가 되었다
내가 나에게 가장 낯설고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는 아닌가?
나를 이기는 것이 어짊에 이르는 길인가?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어짊(仁)에 이르는 길인가?
"나"를 잃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는가?
작은 나(我)를 잃을 때 오히려 더 참된 나에 가까워지는가?
사람의 본성은 본래 선한가, 악한가?
내 안의 본성은 본래 선한 씨앗인가, 다스려야 할 거친 충동인가?
나에게 정직한 것이 하늘의 이치인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성실함(誠)이 곧 하늘의 이치인가?
마음을 끝까지 다하면 나의 본성이 보이는가?
마음을 온전히 다하는 자만이 자기 본성을, 나아가 하늘을 알게 되는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이기심인가, 덕인가?
나를 사랑하는 것에도 옳은 방식과 그른 방식이 있는가?
나는 반복하는 것들의 총합인가?
탁월함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반복된 행위가 빚어낸 습관인가?
나는 기억 속 어디에서 나를 만나는가?
기억이라는 광대한 궁전이 없다면 나는 여전히 나일 수 있는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은 무엇의 씨앗인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 마음이 곧 내가 옳음(義)을 아는 증거인가?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는 내면의 성채가 있는가?
바깥세상이 나를 어쩌지 못하는, 내 안의 무너지지 않는 자리가 있는가?
나는 내게 주어진 배역을 어떻게 연기하는가?
배역을 고르는 건 내가 아니어도, 그 배역을 잘 연기하는 것은 나의 몫인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나는 누구인가?
남이 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도 나를 삼가는 것이 참된 나인가?
나는 나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있는가?
홀로 있을 때 스스로에게 좋은 벗이 되어줄 수 있는가?
타고난 나를 다시 빚을 수 있는가?
거친 본성도 갈고닦으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나는 나를 남처럼 바라볼 수 있는가?
내 안에 나를 지켜보는 공정한 관찰자를 세울 수 있는가?
나는 내 이름값을 하고 있는가?
이름이 가리키는 자리와 실제 나의 모습이 어긋나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나의 주인인가, 욕망의 종인가?
내 안에서 이성이 욕망을 다스릴 때 나는 비로소 나의 주인이 되는가?
나의 욕망 중 어느 것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가?
내가 원하는 것들 중 무엇이 자연스러운 필요이고, 무엇이 헛된 갈망인가?
나는 나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가?
지우고 싶은 일까지 포함해, 나의 운명 전체를 긍정할 수 있는가?
"나"라는 것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몸도 성격도 아니라면, 내가 사랑받는다고 할 때의 그 "나"는 어디에 있는가?
모든 것의 뿌리는 나를 닦는 데 있는가?
세상을 바로잡는 일도 결국 나 하나를 닦는 데서 시작되는가?
참된 벗이란 무엇인가?
쓸모나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됨 자체로 사귀는 벗이 참된 벗인가?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으면 충분한가?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 그것이 평생 지킬 한마디인가?
벗은 또 하나의 나인가?
참된 벗은 나 밖에 있는 남인가, 아니면 또 하나의 나인가?
나의 분노는 정당한가?
분노는 불의에 맞서는 정당한 힘인가, 아니면 잠시 미친 상태일 뿐인가?
나를 세우는 길이 남을 세우는 데 있는가?
내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세우고, 내가 이루고자 하면 남을 이루게 하는 것이 어짊인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은 왜 황금률인가?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넘어, 먼저 선을 베푸는 것이 사람 사이의 참된 법인가?
나는 남의 마음을 정말 알 수 있는가?
내가 그 사람이 아닌데, 나는 그의 기쁨과 슬픔을 정말 알 수 있는가?
원한을 무엇으로 갚아야 하는가?
나를 해친 이에게 원한은 곧음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는 것이 옳은가?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가까운 이들뿐인가, 길에 쓰러진 낯선 이까지인가?
나는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가, 목적으로 대하는가?
사람을 한낱 수단으로 대하는 것과 그 자체로 목적으로 대하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낯선 아이가 위험에 처한 순간, 내 마음은 왜 먼저 움직이는가?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저도 모르게 놀라는 그 마음이, 내가 선하다는 증거인가?
나는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에 끝이 있는가, 아니면 세는 것을 멈추는 데서 용서가 시작되는가?
어울린다는 것은 같아지는 것인가?
참된 어울림은 서로 같아지는 것인가, 다름을 지킨 채 조화하는 것인가?
나를 자라게 하는 벗과 무너뜨리는 벗은 어떻게 다른가?
나를 자라게 하는 벗과 무너뜨리는 벗은 무엇으로 갈리는가?
우정은 무엇 위에 세워질 때 오래가는가?
오래가는 우정은 이해관계 위에 서는가, 서로의 덕(善) 위에 서는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해야 하는가?
가까운 이를 더 사랑하는 것은 편애인가, 아니면 사랑이 흐르는 자연스러운 순서인가?
가까울수록 담담한 사귐이 더 오래가는가?
군자의 사귐이 물처럼 담담하고 소인의 사귐이 단술처럼 달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신의 없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람 구실을 하는가?
수레에 멍에가 없으면 갈 수 없듯, 신의 없는 사람은 어떻게 사람들 사이에서 굴러갈 수 있는가?
벗의 잘못을 어디까지 말해주어야 하는가?
벗에게 충심으로 일러주되, 듣지 않으면 그만두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내 사랑의 원은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는가?
나를 중심으로 한 사랑의 동심원을, 나는 안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가?
남을 위해 쓸수록 나는 정말 줄어드는가?
남에게 베풀수록 내 것이 줄어드는가, 오히려 나에게 더 있게 되는가?
듣기 좋은 말과 꾸민 낯빛에 어짊이 있는가?
남의 환심을 사려는 교묘한 말과 꾸민 표정 속에, 참된 마음은 얼마나 드문가?
서로 애틋하게 적셔주는 것과 서로 잊고 자유로운 것, 어느 쪽이 나은가?
물이 마른 뭍에서 서로 적셔주기보다, 넓은 강호에서 서로 잊고 사는 것이 더 나은 사랑인가?
나는 무슨 자격으로 남을 판단하는가?
남의 눈 속 티끌은 보면서 내 눈 속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사양하고 양보하는 마음은 무엇의 뿌리인가?
먼저 가지려 다투기보다 사양하고 양보하는 그 마음이, 사람다움의 뿌리인가?
나는 벗과의 사귐에서 신의를 지켰는가?
벗과 사귀며 한 말과 약속에 나는 끝까지 신실했는가?
나를 있는 그대로 아는 단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설명할 수 없이 두 영혼이 하나로 녹아드는 우정은, 왜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는 것이, 성숙한 사람의 표시인가?
받은 은혜를 나는 무엇으로 갚아야 하는가?
베풂과 감사는 계산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셈 없이 흐르는 것이 참된 은혜인가?
사람 사이의 짐은 언제 내려놓을 수 있는가?
어짊을 자기 짐으로 삼는다면, 그 짐은 죽어서야 내려놓을 만큼 무겁고 먼 것인가?
모든 것이 향하는 최고선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모든 행위와 기예가 끝내 향하는 하나의 좋음, 그 최고선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고유한 일(기능)이란 무엇인가?
피리 부는 자에게 부는 일이, 눈에 봄이 있듯 —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고유한 일(에르곤)은 무엇인가?
행복은 소유인가, 활동인가?
에우다이모니아, 곧 잘 사는 것은 가만히 지닌 상태인가, 아니면 끊임없이 행하는 활동인가?
단 한 번의 성취로 삶이 좋아지는가?
제비 한 마리가 봄을 만들지 못하듯 — 하루의, 혹은 한 번의 좋은 성취가 잘 산 삶을 만드는가?
군자는 그릇이 아니라면, 나는 무엇이 되려는가?
그릇은 정해진 한 쓰임을 위해 빚어진다 — 사람은 하나의 쓸모로 자신을 빚어야 하는가, 그 이상이 되어야 하는가?
무엇에 뜻을 두고 일할 것인가?
일의 기예(藝)를 익히는 것과 그 일이 향할 도(道)에 뜻을 두는 것 —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아는 자, 좋아하는 자, 즐기는 자 중 누가 앞서는가?
어떤 일을 잘 아는 것,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 — 무엇이 그 일을 끝까지 살아내게 하는가?
이름이 바로 서지 않으면 무엇이 무너지는가?
나의 이름(자리·직분)에 걸맞게 살 때 일이 이루어진다면 — 나는 내 이름의 값을 하고 있는가?
한 사람의 일생은 어떤 계단을 오르는가?
한 사람의 삶은 나이마다 어떤 과업을 지나며, 그 계단의 끝에서 무엇에 이르는가?
어려움을 먼저 맡고 얻음을 뒤로 미룰 수 있는가?
수고를 먼저 짊어지고 대가를 뒤로 미루는 것 — 그것이 일에서 사람됨을 가르는 자리인가?
일을 잘하려는 이는 무엇을 먼저 준비하는가?
좋은 일에는 먼저 벼려진 연장이 있어야 한다면 — 사람의 일에서 그 "연장"이란 무엇인가?
배움에 싫증 내지 않고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을 수 있는가?
평생 배우고 또 남에게 전하는 일 — 그것을 지치지 않고 이어가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나는 내 안의 큰 것을 기르는가, 작은 것을 기르는가?
사람 안에는 큰 것과 작은 것이 있다면 — 나는 무엇을 기르는 일에 내 하루를 쓰고 있는가?
큰 소명 앞에는 왜 먼저 고난이 오는가?
고난이 큰 소명을 위한 담금질이라면 — 지금 나를 짓누르는 이 어려움에도 어떤 뜻이 있는가?
가진 것이 흔들려도 마음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먹고사는 바탕이 흔들릴 때에도 지켜지는 한결같은 마음 — 그것을 나는 지킬 수 있는가?
기예가 도에 이르면 일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소를 잡는 백정의 칼이 십구 년을 새것 같다면 — 일의 기술이 도에 이르는 자리는 어디인가?
쓸모없음에도 쓸모가 있는가?
못 쓰는 나무라서 도끼를 면하고 천수를 누린다면 — 쓸모없어 보이는 것에 어떤 쓸모가 숨어 있는가?
빼어난 일은 재주에서 오는가, 비운 마음에서 오는가?
경탄을 자아내는 일은 뛰어난 솜씨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이해와 두려움을 비워낸 마음에서 나오는가?
해 아래서의 모든 수고로 무엇을 얻는가?
세대는 가고 오며 강물은 바다로 흘러도 바다는 차지 않는다면 — 사람의 수고는 끝내 무엇을 남기는가?
수고 속에서 누리는 기쁨보다 나은 것이 있는가?
수고가 무엇을 남기는지 알 수 없다면 — 그 수고 안에서 오늘 기쁨을 누리는 것이 도리어 몫이 아닌가?
지금 손에 잡힌 일을 온 힘으로 할 수 있는가?
큰 뜻이나 완벽한 조건을 기다리기보다 — 지금 손에 잡힌 그 일을 온 힘으로 하는 것이 답인가?
각자 자기 일을 하는 것이 정의인가?
각자 자기에게 맞는 일을 하고 남의 자리를 넘보지 않는 것 — 그것이 개인과 사회의 정의인가?
가장 높은 삶은 관조하는 삶인가?
분주한 실천의 삶과 고요히 진리를 관조하는 삶 중 — 어느 쪽이 인간이 이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삶인가?
아침에 일어나기 싫을 때,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이불 속의 따뜻함이 나를 붙잡을 때 —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으며, 그 일을 하러 일어날 것인가?
벌집에 이롭지 않은 것이 벌에게 이로울 수 있는가?
내 일이 속한 공동체를 해치면서 나에게만 이로울 수 있는가 — 개인의 이익과 전체의 이익은 나뉠 수 있는가?
나의 본분(의무)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내가 맡은 여러 역할이 저마다 요구하는 본분이 있다면 — 지금 나의 의무는 무엇을 하라고 이르는가?
가장 좋은 일은 물을 닮는가?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만물을 이롭게 하되 다투지 않는다면 — 가장 좋은 일함이란 다투지 않고 이롭게 하는 것인가?
일을 이루고도 그 공에 머물지 않을 수 있는가?
일을 이루고도 그 공을 자기 것으로 붙들지 않는 것 — 그것이 도리어 공을 오래가게 하는가?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는가?
큰 그릇일수록 더디 이루어진다면 —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나의 더딤은 부족의 표시인가, 큰 그릇의 표시인가?
갈림길에서 쉬운 길과 힘든 길, 무엇을 택할 것인가?
젊은 날 갈림길에서 쾌락의 쉬운 길과 미덕의 힘든 길이 갈린다면 — 나는 무엇을 향해 걸을 것인가?
탁월함 앞에 신들은 왜 땀을 두었는가?
탁월함에 이르는 길목에 땀이 놓여 있다면 — 수고 없는 성취를 바라는 것은 애초에 길을 잘못 든 것인가?
몸은 영혼의 감옥인가?
영혼이 몸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면 — 몸은 참된 나를 가두는 벽인가, 아니면 나의 집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닌 것을 나는 구분하는가?
내 뜻대로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 — 몸과 재산과 평판은 어느 쪽이며, 나는 그 경계를 아는가?
몸은 참을 찾는 일을 흐리게 하는가?
몸의 배고픔과 욕망과 두려움이 맑은 생각을 흐린다면 — 참을 보려면 몸에서 얼마나 물러서야 하는가?
영혼과 몸은 둘인가, 하나인가?
영혼이 몸에 깃든 별개의 것이 아니라 몸을 살아 있게 하는 형상이라면 — 나의 몸과 나는 나뉠 수 있는가?
병은 몸을 막아도 의지까지 막는가?
병과 쇠약이 몸을 붙들 때 — 그것이 붙들 수 없는 나의 일부는 무엇인가?
삶을 기르는 길은 무엇을 아끼는 것인가?
삶을 기르는 길(養生)이 넘침도 모자람도 아닌 가운데 있다면 — 나는 무엇을 아끼고 무엇을 덜어야 하는가?
나는 살과 숨과 이성, 그 밖에 무엇인가?
나를 이루는 살과 숨과 이성 가운데 — 무엇이 나를 이끄는 자리이며, 나는 무엇을 나 자신으로 삼는가?
나는 시체를 짊어진 작은 영혼인가?
나를 이루는 몸이 짊어진 짐이자 언젠가 내려놓을 것이라면 — 나는 몸을 어떻게 지고 가야 하는가?
몸 안에 기르는 큰 기운이 있는가?
몸과 마음을 채우는 크고 굳센 기운이 길러지는 것이라면 — 나는 무엇으로 그것을 기르며, 무엇으로 그것을 굶기는가?
내게 몸이 있기에 근심이 있는가?
몸이 있어 배고픔과 병과 죽음의 두려움이 온다면 — 몸은 근심의 뿌리인가, 그럼에도 나의 근거인가?
나에게 몸을 준 것을 나는 받아들이는가?
자연이 나에게 몸과 삶과 늙음과 죽음을 함께 주었다면 — 나는 이 몸의 늙어감마저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나는 몸의 어느 부분을 기르고 있는가?
몸에도 귀하고 천한 부분이 있어 무엇을 기르느냐가 사람을 가른다면 — 나는 지금 무엇을 먹이고 무엇을 굶기는가?
내 몸이 무엇으로 바뀌든 받아들일 수 있는가?
병들고 굽고 뒤틀린 몸조차 조물주가 준 것이라면 — 나는 뜻대로 안 되는 이 몸을 원망하는가, 받아들이는가?
내 몸은 온전히 나의 것인가?
내 몸이 부모에게서 받아 이어진 것이라면 — 몸은 온전히 내 소유인가, 나를 넘어선 무언가에 속한 것인가?
삶의 끝에서 몸을 온전히 지켰다 말할 수 있는가?
평생 조심히 지켜온 몸을 삶의 끝에서 돌아본다면 — 나는 이 몸을 어떻게 살아냈다 말하게 될까?
몸의 즐거움에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는가?
즐거움이 고통의 부재에서 완성된다면 — 나는 채워도 끝없는 갈망을, 채워지면 그치는 만족과 구분하는가?
모든 것이 흙으로 돌아간다면 몸은 무엇인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이 몸이라면 — 그 유한함은 삶을 헛되게 하는가, 오히려 귀하게 하는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 이 말은 저주인가?
이마의 땀과 흙으로의 돌아감이 함께 주어진 것이라면 — 몸의 수고와 유한함은 벌인가, 인간의 조건인가?
몸은 정말 그토록 많은 것을 필요로 하는가?
아이가 손으로 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 컵마저 버렸다면 — 나의 몸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얼마나 적은가?
내 생명이 한낱 숨결이라면?
내 생명이 잠깐 스치는 숨결이라면 — 그 덧없음은 나를 절망케 하는가, 지금 이 숨을 붙잡게 하는가?
나의 연약함을 아는 눈길이 있다면?
나의 연약함과 유한함이 심판이 아니라 이해의 눈으로 보아진다면 — 나는 나의 몸을 조금 다르게 대할 수 있을까?
나의 욕망 중 무엇이 자연스럽고 무엇이 헛된가?
몸의 욕망을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과 헛된 것으로 나눌 수 있다면 — 나는 지금 무엇을 좇고 있는가?
몸은 악한가, 아니면 본래 선한가?
악의 뿌리가 몸에 있지 않고 의지에 있다면 — 몸을 탓하며 살아온 나의 시선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내가 원하는 선을 내가 행하지 못하는 까닭은?
마음은 선을 원하는데 몸은 다른 것을 행한다면 — 나를 둘로 갈라놓는 이 힘은 무엇인가?
몸은 갈아입는 옷과 같은가?
몸이 참나가 잠시 걸치는 옷이라면 — 나는 이 몸을 나 자신으로 여기는가, 걸친 것으로 여기는가?
몸 안에, 몸 아닌 무엇이 있는가?
변하는 몸 가운데 변하지 않는 무엇이 있다면 — 나는 몸의 변화에 흔들릴 때 그것을 붙들 수 있는가?
삶은 짧고 익힐 것은 긴가?
몸으로 사는 삶은 짧은데 이루고 익힐 것은 끝없이 길다면 — 나는 이 짧은 시간을 무엇에 쓸 것인가?
몸은 영혼이 지고 가는 무게인가?
몸이 영혼이 지고 가는 무게라면 — 그 무게는 벗어야 할 짐인가, 지고 가는 동안 함께 살아야 할 것인가?
늙어가는 몸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몸이 쇠하는 노년이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면 — 나는 늙어가는 몸을 상실로만 보는가, 다른 결실로도 보는가?
이 몸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이 몸이 아름답게 꾸며졌으나 병들고 스러지는 것이라면 — 나는 몸을 집착으로 붙드는가, 있는 그대로 보는가?
삼년상은 너무 긴가 — 효는 관습인가 마음인가?
부모를 향한 애도의 길이는 예법으로 정할 수 있는가, 마음이 다할 때까지인가?
부모를 봉양함과 공경함은 무엇이 다른가?
부모를 먹여 살리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효의 본질인가?
부모께 끝내 묻지 못한 물음은 무엇인가?
섬김 중 가장 큰 것이 부모를 섬기는 일이라면, 그 섬김이 끝나기 전 나는 무엇을 다 물어야 하는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 — 이것은 어떤 종류의 계명인가?
신을 향한 계명과 사람을 향한 계명이 나뉘는 십계명에서, 부모 공경은 어느 쪽에 놓이는가?
부모가 살아 계시면 멀리 떠나지 말아야 하는가?
자식의 길과 부모 곁을 지키는 일이 부딪힐 때, 무엇이 먼저인가?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땐 뜻을, 돌아가신 뒤엔 행실을 살피라는 말은 옳은가?
부모의 뜻을 잇는 것과 자신의 길을 걷는 것, 효는 어디까지 앞선 세대를 따르라 요구하는가?
부모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도 자식은 효를 다해야 하는가?
부모가 끝내 자식을 미워하고 해치려 했더라도, 자식의 사모함은 평생 이어져야 하는가?
부모의 나이를 기쁨과 두려움으로 함께 헤아려야 하는가?
부모가 나이 들어감을 지켜보는 마음은, 기쁨과 두려움 중 어느 쪽이 더 정직한가?
초상을 신중히 치르고 조상을 추모하면 무엇이 두터워지는가?
한 사람이 부모의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가는, 그 개인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무엇을 결정하는가?
부모의 잘못을 알았을 때 자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모가 틀렸다고 여겨질 때, 자식은 침묵해야 하는가 맞서야 하는가, 아니면 세 번째 길이 있는가?
부모께서 남겨 주신 몸을 삼가는 것이 효의 시작인가?
내 몸을 지키는 일이 어떻게 부모를 향한 효의 첫걸음이 되는가?
나를 낳고 기르시느라 애쓰신 부모의 수고는 무엇으로 갚을 수 있는가?
부모를 미처 봉양하기도 전에 여읜 자식은, 그 수고에 무엇으로 답할 수 있는가?
부모의 유일한 근심은 자식이 병날까 하는 것뿐인가?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성공이 아니라 그저 건강히 살아있는 것인가?
내가 지금의 나로 서기까지, 가족에게서 받은 것을 낱낱이 헤아릴 수 있는가?
한 사람의 성품과 삶의 태도는,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물려받은 것들의 총합인가?
한 어머니의 눈물이, 방황하던 자식의 영혼을 실제로 되돌릴 수 있는가?
자식이 어떤 길로 방황하든, 부모가 끝까지 놓지 않는 마음은 결국 그 자식을 되돌려 놓는가?
나를 낳고 기른 나라의 법은, 부모처럼 거스를 수 없는 존재인가?
나를 낳은 부모에 대한 의무와, 나를 길러낸 국가와 법에 대한 의무는 같은 무게인가?
자식이 부모에게 진 사랑의 빚은, 원리상 다 갚을 수 없는 것인가?
대등하지 않은 두 사람 사이의 사랑도, 대등한 사랑과 똑같이 우정이라 부를 수 있는가?
유배당한 자식이 슬퍼하는 어머니를 위로할 때, 그는 누구를 먼저 돌보는 것인가?
가장 큰 고난을 겪는 사람이, 오히려 그 고난 앞에서 부모를 먼저 위로할 수 있는가?
부모가 태어나기 전, 그대의 본래 얼굴은 무엇이었는가?
부모에게서 몸을 받기 이전, 나라 부를 만한 무언가가 이미 있었는가?
모든 의무 중, 부모에 대한 의무가 가장 먼저 놓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국을 향한 사랑도, 사회를 향한 정의감도, 결국 부모를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인가?
효는 처지를 가리지 않고 부모를 편안케 하는 마음인가?
가난하든 부유하든, 편안하든 고달프든, 그 처지를 원망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효의 완성인가?
사랑은 부모부터 차등 있게 넓혀가야 하는가, 처음부터 모두에게 같아야 하는가?
내 부모를 남의 부모와 똑같이 사랑하라는 요구는, 참된 사랑의 완성인가 사랑의 본질을 놓친 것인가?
아버지의 훈계와 어머니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무엇을 지키는 일인가?
세대를 건너온 부모의 말은, 낡아 버려도 되는 잔소리인가 여전히 살아있는 지혜인가?
부모를 향한 효와 형제간 우애는, 인(仁)이라는 큰 나무의 뿌리인가?
타인을 향한 넓은 사랑(仁)은, 가장 가까운 가족을 향한 작은 사랑에서부터 자라나는 것인가?
내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어떻게 세상 모든 노인을 향한 존중으로 넓어지는가?
한 가정을 잘 다스리는 마음이, 정말로 한 나라를 잘 다스리는 마음의 시작이 될 수 있는가?
국가는 가정이라는 가장 작은 공동체 위에서만 세워질 수 있는가?
정의롭고 좋은 국가는, 그 국가를 이루는 가정들이 먼저 건강해야만 가능한 것인가?
아버지가 멀리서부터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안은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조건을 따지기 전에 먼저 달려가 안는 사랑은, 사람에게도 정말 가능한 것인가?
효도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물질을 드리는 것인가, 온화한 낯빛을 짓는 것인가?
일을 대신 해드리고 음식을 챙겨드리는 것만으로, 효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자식이 부모를 위해 제 목숨을 거는 것은 효의 극치인가, 효의 왜곡인가?
눈먼 아버지를 위해 딸이 목숨을 내놓는 이야기를, 우리는 효의 아름다움으로 읽어야 하는가 효의 무게로 읽어야 하는가?
부모의 은혜는, 원리상 자식이 갚을 수 있는 것인가?
갚을 수 없는 은혜 앞에서, 자식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선의 일은 무엇인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그 사이에서 뿌리로 남는 것은 무엇인가?
부모도 나도 결국 지나가는 한 세대일 뿐이라면, 그 사이에서 대물림되어 뿌리로 남는 것은 무엇인가?
부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인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일 뿐인가?
사람들이 좋은 삶의 조건으로 가장 먼저 꼽는 부는, 정말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는가?
의롭지 않은 방법으로 얻은 부귀는, 나에게 무엇인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얻은 부와 지위는, 손에 쥐어도 정말 내 것이라 할 수 있는가?
가난은 불행인가, 자유인가?
가진 것이 적다는 것은 결핍인가, 아니면 잃을 것이 적어 오히려 자유로운 상태인가?
아무것도 갖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가 가장 가진 것 없는 자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무엇이라 답할 수 있는가?
재물이 주는 가장 큰 유익은, 그것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
늙은 부자에게 재물이 정말 값진 것은, 그것으로 무엇을 살 수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인가?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면, 무엇이 그 갈증을 멈추는가?
더 많이 가지면 만족할 수 있다는 믿음은, 감각과 욕망의 본래 구조와 애초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닌가?
평생 애써 얻은 것을, 얼굴도 모를 다음 사람에게 남기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내가 평생 쌓은 것을, 그것을 쌓느라 흘린 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 대가 없이 물려받는다면, 그 쌓음의 의미는 어디 있는가?
돈을 사랑함이 정말 모든 악의 뿌리인가?
돈 자체가 아니라 "돈을 사랑함"이 문제라면, 그 둘을 가르는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완전함에 이르려면, 가진 것을 전부 내려놓아야 하는가?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진짜 장애물은 무엇인가?
내일의 곳간을 더 크게 짓는 동안, 오늘 밤을 계산에 넣지 못한다면 무엇이 남는가?
풍년을 위해 더 큰 곳간을 짓는 계획은, 정말 미래를 위한 지혜인가 죽음을 계산에서 뺀 착각인가?
가진 것의 극히 일부를 낸 사람과, 가진 전부를 낸 사람 중 누가 더 많이 낸 것인가?
값어치는 낸 액수의 크기로 정해지는가, 아니면 그것이 그 사람의 전체에서 차지하는 몫으로 정해지는가?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다는 결심은, 무엇을 되찾으려는 것인가?
부당하게 쌓은 부를 가진 사람이 스스로를 되찾는 길은, 그것을 내어놓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는가?
가진 것을 다 잃어도, 나는 여전히 나인가?
재산과 자녀를 하루아침에 다 잃은 사람이 여전히 자기 자신일 수 있다면, 그를 그 사람이게 하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무엇인가?
족함을 아는 것이, 실은 가장 큰 부유함인가?
부유함은 얼마나 가졌는가로 정해지는가, 아니면 언제 멈춰야 하는지를 아는 데서 정해지는가?
얻기 어려운 재화는, 어떻게 사람의 행실을 어지럽히는가?
희소하고 값진 것을 향한 욕망은, 그것을 갖기 전부터 이미 사람을 바꿔놓기 시작하는가?
천하를 주겠다는 제안을 스스로 거절하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가장 큰 것을 가질 기회를 스스로 버리는 것은 어리석음인가, 아니면 자기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을 아는 지혜인가?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는 이 구분은,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을 가르는가?
어떤 선택 앞에서 먼저 떠오르는 물음이 "이것이 옳은가"인지 "이것이 이득인가"인지가, 사람의 됨됨이를 가르는가?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는 것과, 가난해도 즐거워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높은 경지인가?
가난이나 부유함이 사람을 비굴하게도 오만하게도 만들지 않는 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그 처지 속에서 적극적인 즐거움과 예의를 찾아야 하는가?
일정한 생업이 없이도, 변치 않는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경제적 안정과 도덕적 일관성 중, 무엇이 먼저 갖춰져야 다른 하나가 가능해지는가?
검소함은 미덕인가, 아니면 그저 부족함을 감춘 다른 이름인가?
사물의 값어치를 그것이 주는 실질적 쓸모로만 재야 하는가, 아니면 아름다움과 여유에도 자리가 있는가?
운명의 수레바퀴가 준 재물은, 애초에 진짜 내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내가 소유했다고 믿는 재물이, 실은 늘 돌고 있는 운명의 수레바퀴 위에 잠시 얹혀 있던 것뿐이라면, 무엇이 진짜 내 것인가?
재물의 많고 적음이, 사람의 좋고 나쁨을 가르는 진짜 기준일 수 있는가?
내가 가진 재물의 크기가, 정말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가?
화려한 것들의 겉모습을 벗겨내면, 그 아래에는 정말 무엇이 남는가?
값비싼 것을 값비싸게 만드는 것은 그 물건 자체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 위에 덧씌운 상상인가?
이익을 좇는 마음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가, 다스려야 할 대상인가?
이익을 좇는 마음을 타고난 본성으로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그것을 다스릴 더 현실적인 길을 여는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얻은 부는, 손에 쥐어도 진짜 내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재산을 늘리는 것 자체는 정당하되, 그 방법이 정당하지 않다면 그 부는 여전히 나의 것인가?
가난도 부도 말고, 오직 필요한 만큼만 달라는 기도는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
너무 없으면 마음이 쪼그라들고 너무 많으면 마음이 교만해진다면, 사람이 정말 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재물만 믿고 기대는 사람은 왜 넘어지는가?
재물을 삶의 뿌리로 삼는 것과, 재물을 삶의 도구로 쓰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많은 재물보다 아름다운 이름을 택하는 것은, 무엇을 더 오래가는 것으로 보는가?
재물은 늘었다 줄었다 하지만, 이름은 한번 금이 가면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면, 무엇을 먼저 지켜야 하는가?
부자가 되려는 애씀에는 끝이 없다면, 그 끝없음 자체가 이미 답이 아닌가?
더 가지려는 마음에 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왜 계속 그 끝없음을 향해 달려가는가?
적게 가져도 단잠을 자는 사람과, 많이 가지고도 잠 못 이루는 사람 중 누가 더 부유한가?
노동으로 얻은 단잠과, 재물이 주는 불면 중 어느 쪽이 진짜 부유함에 더 가까운가?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후회는 의미가 있는가?
모든 일이 이미 정해진 인과의 사슬이라면, 지난 선택을 후회하고 다음 선택에 애쓰는 일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자유는 어디에서 비집고 들어오는가?
만물이 원인의 사슬로 이어져 있다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은 대체 어느 틈에서 비집고 들어오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이미 벌어져 되돌릴 수 없는 일을 앞에 두고, 나는 그것을 원망할 것인가 아니면 나의 몫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내 손으로 한 일과 어쩔 수 없이 한 일은 어떻게 다른가?
자발적으로 한 행위와 강제나 무지로 한 행위는 어떻게 구별되며, 후회는 그중 어느 편에만 정당하게 따라붙는가?
나비의 꿈인가, 나의 꿈인가?
깨어 있음과 꿈, 나와 나비 사이에 무엇이 참인지 가를 확고한 경계가 정말 있는가?
내 삶에 주어진 몫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의 큰 흐름을 "하늘이 내린 몫"으로 안다는 것은 체념인가, 아니면 더 깊은 앎인가?
악은 어디에서 오며, 그것은 누구의 선택인가?
악이 세상에 있다면 그것은 신의 탓인가, 물질의 탓인가, 아니면 오직 인간이 잘못 향한 의지의 몫인가?
내일이 이미 알려져 있다면, 나는 여전히 자유로운가?
만약 모든 미래가 이미 완전히 알려져 있다면, 내가 내리는 선택은 정말 열려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알려진 대로 흘러갈 뿐인가?
어쩔 수 없는 일을 어떻게 편안히 받아들이는가?
내 힘으로 도무지 바꿀 수 없는 일을, 원망 없이 마치 제 운명인 듯 편안히 받아들이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피할 수 있었던 불행도 "운명"이라 불러야 하는가?
모든 일이 하늘의 명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위험을 자초해 얻은 불행까지 "제 운명"이라 받아들여야 하는가?
내가 자유롭다는 느낌 자체가 착각은 아닌가?
나의 선택이 자유롭다는 확신은 참된 자유의 증거인가, 아니면 나를 밀어 온 원인들을 내가 보지 못한다는 무지의 증거인가?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도 이루는 삶은 가능한가?
무언가를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고 흐름에 따르면서도 어긋남과 후회 없이 이루는 삶은, 정말 가능한 것인가?
자유와 필연은 정말 서로를 배제하는가?
내 행동이 성격과 동기에 의해 규칙적으로 정해진다는 사실과, 그 행동이 나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사실은 정말 충돌하는가?
정해진 세계에서 내 책임은 어디에서 오는가?
외부의 원인이 나를 밀어 움직이게 한다면, 그 행동에 대한 책임과 후회는 여전히 나에게 있는가?
운명을 원망하며 끌려갈 것인가, 기꺼이 걸어갈 것인가?
어차피 같은 곳에 이른다면, 나는 운명을 원망하며 끌려갈 것인가 아니면 기꺼이 나란히 걸을 것인가?
"다 정해진 운명"이라는 말은 게으른 자의 변명은 아닌가?
모든 것이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는 믿음은 위로인가, 아니면 노력을 포기하게 만드는 위험한 변명인가?
자연의 인과 한복판에서 자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모든 사건이 앞선 원인에 의해 필연적으로 정해진다면, 새로운 일을 스스로 시작하는 자유는 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늘을 원망할 것인가, 하늘의 이치를 다스려 쓸 것인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 앞에서, 하늘을 원망하며 매달릴 것인가 아니면 그 이치를 배워 능동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이것이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면, 나의 불행은 무엇인가?
완전한 신이 이 세계를 가능한 최선으로 택했다면, 내가 겪는 불행과 후회는 그 최선 안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할 수 있는가?
인간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지만, 무엇을 원할지 그 자체를 원할 수도 있는가?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 일인가, 그 일에 대한 나의 생각인가?
지난 일에 대한 나의 후회는 그 일 자체에서 오는가, 아니면 그 일에 내가 붙인 판단에서 오는가?
인간의 의지는 자유로운가, 아니면 이미 사로잡혀 있는가?
나의 의지는 스스로 선을 택할 만큼 자유로운가, 아니면 나보다 큰 힘에 이미 사로잡혀 있는가?
노력과 운명이 다툰다면, 누가 더 멀리 미치는가?
한 사람의 성패는 그의 노력이 만든 것인가, 아니면 노력조차 넘어서 흐르는 운명이 정한 것인가?
우리는 왜 조용한 방 안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끊임없이 바쁨과 오락으로 자신을 채워, 홀로 조용히 있는 순간을 견디지 못하는가?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은 함께 설 수 있는가?
신이 모든 것을 섭리로 다스린다면, 인간의 선택은 여전히 자유로운가 아니면 섭리 안에서 미리 정해진 것인가?
별이 나를 기울게 할 뿐 강제하지 않는다면, 잘못은 누구의 것인가?
세상과 별과 조건이 나를 어떤 방향으로 기울인다 해도, 끝내 그 기울임에 굴복할지 말지는 여전히 나의 몫인가?
일어나지 않은 일도 "가능했던 일"이라 부를 수 있는가?
실제로 일어난 일만이 진정 가능한 일이라면, 끝내 일어나지 않은 그 모든 "다른 선택"은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았던 것인가?
어진 이가 버림받고 어리석은 이가 출세한다면, 성패는 무엇이 정하는가?
똑같이 애쓴 두 사람의 삶이 갈린다면, 그것은 노력이나 덕의 차이인가 아니면 그저 때와 자리를 만나고 못 만난 우연의 차이인가?
모든 것이 원인으로 정해진 세계에도 "우리에게 달린 것"은 남는가?
세상의 모든 일이 앞선 원인의 사슬로 정해진다는 스토아의 말이 옳다면, 인간에게 "우리에게 달린 것"이라 부를 자리가 정말 남는가?
나를 이렇게 만든 주재자가 없다면, 나는 스스로 그러한 것인가?
나를 이렇게 있게 한 어떤 조물주도 명령자도 없다면, 지금의 나는 누구의 뜻도 아닌 오직 스스로 그러함(自然)으로 여기 있는 것인가?
인간에게 정해진 본성이 없다면, 나는 나를 무엇으로 빚을 것인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인간에게는 미리 정해진 본성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나를 어떤 존재로 빚어 갈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지는 것인가?
죽음이 오면 나는 없고, 내가 있으면 죽음은 없다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은 나에게 닿지 못하고 죽음이 닿는 순간 나는 이미 없다면, 죽음은 정말 두려워할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죽음을 먼저 물어 무엇하겠는가?
죽음 너머를 캐묻기보다 지금 여기의 삶을 온전히 사는 데 마음을 두라는 이 말은, 죽음의 회피인가 아니면 더 깊은 지혜인가?
죽음 그 자체에게 죽음 뒤의 일을 묻는다면?
몸은 분명히 스러지는데, 그 스러짐과 함께 나의 무엇도 온전히 사라지는가 아니면 사라지지 않는 무엇이 남는가?
아내가 죽었는데 어찌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하는가?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서, 슬픔을 넘어 그 죽음을 사계절의 순환처럼 담담히 받아들이는 경지는 냉정함인가 아니면 더 깊은 사랑인가?
죽음이 깊은 잠 같은 것이라면, 그것을 나쁘다 할 수 있는가?
죽음이 꿈 없는 깊은 잠이거나 다른 곳으로의 옮겨감 둘 중 하나라면, 우리는 어째서 그것을 그토록 확실한 재앙으로 여기며 두려워하는가?
제 몸을 위하지 않기에 오히려 오래가는 것이 있는가?
오래 사는 것이 단지 몸의 목숨을 늘리는 일이 아니라면, 몸이 스러진 뒤에도 스러지지 않고 남는 것은 무엇이며 나는 그것을 지니고 있는가?
잘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삶을 어둡게 하는가, 자유롭게 하는가?
언젠가 반드시 올 죽음을 미리 마음에 두고 연습하는 일은 삶을 두려움으로 어둡게 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오늘을 온전히 자유롭게 사는 힘이 되는가?
태어난 것에 죽음이 정해져 있다면, 죽음을 슬퍼해야 하는가?
태어난 모든 것에 죽음이 정해져 있고 죽은 것에 다시 태어남이 정해져 있다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우리는 마땅히 그토록 슬퍼해야 하는가?
잘 익은 열매가 저절로 떨어지듯, 죽음도 그러할 수 있는가?
한 생을 충분히 익힌 사람에게 죽음이 잘 익은 열매가 저절로 떨어지듯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노년과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익어감의 결실일 수 있는가?
흙은 흙으로 돌아간다면, 그 돌아감은 끝인가 제자리인가?
몸이 왔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라면, 그 돌아감은 헛된 소멸인가 아니면 본래 있던 자리로의 조용한 귀환인가?
오래 살든 일찍 죽든 마음을 두 갈래로 두지 않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수명의 길고 짧음이 내 뜻 밖의 일이라면, 그것에 마음을 흔들리지 않고 다만 오늘의 나를 닦으며 담담히 기다리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태어나기 전의 영원은 두렵지 않았는데, 왜 죽은 뒤의 영원은 두려운가?
내가 태어나기 전 무한한 시간의 부재가 나를 조금도 괴롭히지 않았다면, 내가 죽은 뒤 이어질 똑같은 부재를 왜 그토록 두려워해야 하는가?
죽음을 겪지 않은 집을 단 하나라도 찾을 수 있는가?
내 슬픔이 오직 나만의 것이 아니라 죽음을 겪지 않은 집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상실의 아픔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세대가 나뭇잎처럼 나고 진다면, 나의 스러짐도 그 결의 일부인가?
수많은 세대가 나뭇잎처럼 돋아났다 스러지기를 되풀이해 온 자연의 결 안에서, 나의 태어남과 스러짐도 두려워할 이변이 아니라 그 결의 한 자락일 뿐인가?
옛사람이 죽은 이를 "돌아간 사람"이라 불렀다면, 죽음은 집으로 가는 길인가?
삶이 잠시 길 위에 머무는 나그넷길이고 죽음이 본래 자리로의 돌아감이라면, 우리는 돌아갈 곳 없는 이가 아니라 돌아갈 집을 지닌 이인가?
날의 수를 헤아릴 줄 알게 된다면, 그 앎은 지혜가 되는가?
삶의 날이 끝이 있고 셀 수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마주할 때, 그 유한함의 자각은 마음을 어떤 지혜로 이끄는가?
같은 한 번의 죽음도 태산처럼 무겁거나 깃털처럼 가벼울 수 있는가?
죽음은 누구에게나 꼭 한 번 오는 똑같은 사건인데, 무엇이 그 한 번의 죽음을 태산처럼 무겁게도 깃털처럼 가볍게도 만드는가?
지혜를 사랑하는 삶이 곧 죽음을 연습하는 삶이라면?
지혜를 향한 삶이 몸의 욕망에서 영혼을 조금씩 자유롭게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이미 죽음이 완성할 자유를 미리 연습하는 것과 같은가?
지어진 모든 것이 덧없음을 늘 잊지 않는다면,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지어진 모든 것이 언젠가 스러진다는 사실을 두려움이 아니라 맑은 자각으로 늘 곁에 둔다면, 그 무상의 앎은 오늘의 삶을 어떻게 깨우는가?
세상을 떠난 뒤 이름이 불리지 않음을 근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죽음 이후에 남을 이름을 근심한다는 것은 헛된 명예욕인가, 아니면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를 되묻는 다른 방식인가?
사랑하는 이를 껴안는 순간에도 그가 죽을 존재임을 기억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이를 껴안는 순간에도 그가 언젠가 떠날 존재임을 기억한다면, 그 앎은 사랑을 식게 하는가 아니면 상실의 아픔을 견디게 하는가?
큰 변화의 물결에 몸을 맡겨 기뻐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을 수 있는가?
삶과 죽음이 하나의 큰 변화(大化)의 물결일 뿐이라면, 그 물결에 몸을 맡겨 기뻐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평온은 어떻게 이르는 것인가?
사람은 꽃처럼 지지만, 나무에는 다시 움틀 희망이 있다면?
베인 나무조차 다시 움트는데 사람은 한 번 스러지면 그만인 듯 보인다면, 우리는 이 유한함을 어떻게 정직하게 마주하며 그 안에서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죽은 이를 향한 예(禮)는 미신인가, 산 자의 마음을 위한 것인가?
죽은 이는 이미 알 수 없는데도 우리가 정성껏 장례와 제례를 갖추는 것은, 헛된 미신인가 아니면 삶과 죽음을 대하는 산 자의 마음을 바로 세우는 일인가?
죽은 자들의 왕이 되느니 산 자의 종이 되겠다는 말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가장 위대한 영웅조차 죽음 뒤의 명예보다 살아 있는 하루를 더 그리워한다면, 이 절절한 삶의 사랑은 죽음을 두려워함인가 아니면 삶을 귀히 여김인가?
모인 자리가 언젠가 흩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 만남은 왜 그토록 소중한가?
즐거운 모임도 언젠가 흩어지고 우리 모두 스러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이 만남과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글로 남기려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가?
죽음을 미리 익혀 두면, 오히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놓여나는가?
죽음을 애써 외면하는 대신 미리 자주 헤아려 익숙해지는 편이, 오히려 죽음의 두려움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한 삶이 행복했는지는 그 끝에 이르러서야 말할 수 있는가?
삶의 어느 화려한 순간도 그 뒤에 무엇이 올지 알 수 없다면, 한 사람의 삶이 행복했다고 말하는 일은 그 삶이 온전히 끝난 뒤에야 가능한 것인가?
삶의 끝에서 "내 삶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하고 묻는다면, 그 물음은 너무 늦은 것인가?
삶의 끝에 이르러서야 "나는 제대로 살았는가"를 처음으로 정직하게 묻게 된다면, 그 물음은 너무 늦은 것인가 아니면 삶을 마지막으로 바로 세울 마지막 기회인가?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만은 아는가?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이성이 닿을 수 있는 앎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모든 것을 의심한 뒤 무엇이 확실히 남는가?
모든 것이 속임수일 수 있다 해도 끝내 의심할 수 없는 것은 무엇으로 남는가?
앎은 참된 믿음에 무엇을 더한 것인가?
우연히 맞힌 참된 생각과 참으로 아는 것 사이에는 무엇이 놓여 있는가?
모르는 것을 어떻게 찾아 나서는가?
이미 알면 찾을 필요가 없고 전혀 모르면 찾을 수도 없다면, 탐구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배움은 잊었던 것을 다시 떠올리는 일인가?
우리는 새 앎을 밖에서 얻는가, 아니면 영혼 안에 잠든 것을 다시 깨우는가?
우리가 보는 것은 실물인가, 벽에 비친 그림자인가?
내가 실재라 믿는 것이 실은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일 수 있는가?
참모습은 스스로를 감추는가?
사물의 참모습은 겉으로 드러나는가, 아니면 캐물어야만 벗겨지는가?
감각의 길과 진리의 길, 어느 것이 참인가?
변화하고 사라지는 감각 세계와 변치 않는 이성의 진리 중, 무엇이 참으로 있는 것인가?
확실한 것이 없다면 판단을 멈춰야 하는가?
모든 주장에 똑같이 힘센 반대 주장이 맞선다면, 나는 무엇도 단정하지 말아야 하는가?
내일도 해가 뜬다고 무엇으로 확신하는가?
지금껏 늘 그랬다는 사실이,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가?
인과란 우리가 습관으로 덧씌운 것인가?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을 일으킨다는 그 "힘"을, 우리는 정말 본 적이 있는가?
마음은 태어날 때 백지인가?
우리 마음은 무언가를 이미 새긴 채 태어나는가, 경험이 채우기를 기다리는 빈 서판인가?
백지에도 이미 새겨진 것이 있는가?
모든 앎이 감각에서 온다 해도, 그 감각을 받아들이는 틀만은 타고나는 것 아닌가?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인가?
아무도 지각하지 않는 사물이 그래도 존재한다고, 우리는 무엇으로 아는가?
무엇이 우리의 앎을 가로막는가?
나의 앎을 흐리는 것은 세계의 어려움인가, 내 마음에 박힌 우상인가?
인간은 본성상 알기를 원하는가?
알고자 하는 마음은 필요에서 나온 도구인가, 인간 본성에 새겨진 갈망인가?
모든 증명은 증명 없는 출발점을 가지는가?
증명은 앞선 근거를 요구하는데, 그 사슬의 첫 고리는 무엇이 떠받치는가?
많이 듣되 의심스러운 것은 제쳐 두는 것이 참된 앎인가?
참된 앎이란 많이 아는 것인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를 정직하게 아는 것인가?
배움과 생각, 하나만으로 충분한가?
앎은 밖에서 배워 쌓이는가, 안에서 생각해 깊어지는가 — 둘 중 하나로 온전한가?
나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어떻게 아는가?
나 아닌 존재의 마음을, 나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옳고 그름은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갈리는가?
옳음과 그름은 사물에 새겨진 것인가, 보는 자리에 따라 갈리는 것인가?
앎은 타고나는가, 쌓아 만드는가?
지혜는 하늘이 준 재능인가, 한 걸음씩 쌓아 올린 인위의 결실인가?
앎과 행함은 둘인가, 하나인가?
알면서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정말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캐면 앎에 이르는가?
앎은 사물 하나하나를 파고들어 넓혀 가는가, 마음을 돌이켜 단번에 밝히는가?
믿어야 이해하는가, 이해해야 믿는가?
앎은 아무 전제 없이 시작되는가, 아니면 어떤 믿음을 딛고서야 이해로 나아가는가?
신앙과 이성은 다투는가, 손잡는가?
이성으로 캐물을 수 있는 앎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앎은 서로 부딪히는가, 하나의 진리로 이어지는가?
마음은 이성이 모르는 것을 아는가?
논증으로 닿지 못하는 진리를, 마음은 다른 길로 아는가?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내가 확실하다 여기는 모든 것을 저울에 올린다면, 정말로 남는 앎은 무엇인가?
참은 무엇으로 참임을 아는가?
참됨을 재는 더 높은 잣대는 없다면, 무엇으로 우리는 참을 참이라 아는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 묻지 않으면 알고, 물으면 모른다?
누구나 겪으며 살지만 아무도 말로 붙잡지 못하는 것 —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지나간 것과 오지 않은 것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과거는 이미 없고 미래는 아직 없다면, 있는 것은 오직 붙잡을 수 없는 현재뿐인가?
시간은 마음이 늘어난 것인가?
우리가 시간의 길고 짧음을 잰다면, 그 자는 세계 안에 있는가 마음 안에 있는가?
시간은 움직임을 세는 수인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아무 움직임도 없다면, 그래도 시간은 흐르는가?
"지금"은 시간의 한 조각인가, 경계인가?
"지금"은 시간의 가장 작은 조각인가, 아니면 과거와 미래를 가르는 폭 없는 경계인가?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있는가?
모든 것이 쉼 없이 흐른다면, 어제의 강과 오늘의 강은 같은 강인가?
있는 것에 생성도 소멸도 없다면, 시간은 환상인가?
참으로 있는 것이 변하지 않는다면, 흐르고 지나가는 시간은 진짜인가 겉모습인가?
날아가는 화살은 매 순간 멈춰 있는데 어떻게 나는가?
시간이 폭 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고 화살이 매 순간 정지해 있다면, 움직임은 어떻게 생기는가?
시간은 영원의 움직이는 모상인가?
시간은 영원의 그림자로서 그것을 향해 흐르는가, 아니면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인가?
우리는 오직 현재만을 잃을 수 있는가?
과거는 이미 지났고 미래는 아직 없다면, 삶에서 우리가 참으로 가진 것은 지금뿐인가?
만물이 강물처럼 흘러가는데 무엇에 매달리는가?
모든 것이 나타나자마자 쓸려가는 강이라면, 무엇을 붙잡아 두려는 마음은 어디에 딛고 서는가?
인생은 짧은가, 우리가 짧게 만드는가?
인생이 짧다는 한탄은 진실인가, 흘려보낸 시간에 대한 변명인가?
가장 큰 낭비는 미루는 것인가?
내일로 미루는 습관은 시간을 아끼는 것인가, 오늘이라는 유일한 확실을 버리는 것인가?
오늘을 붙잡으라 — 내일을 얼마나 믿는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면,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후회가 없는가?
시간은 만물을 삼키는가?
시간이 결국 모든 것을 갉아 삼킨다면, 그 이빨을 견디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에 때가 있다면, 지금은 무엇을 할 때인가?
날 때와 죽을 때, 심을 때와 거둘 때가 따로 있다면, 나는 지금이 무엇을 할 때인지 아는가?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가?
지금 새롭다 여기는 것도 이미 오래전에 있던 것의 되돌아옴일 뿐인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그대로인가?
나의 짧은 생이 지나가도 세계는 무심히 이어진다면, 이 짧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 시간은 멈추지 않는가?
강물처럼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하며 그 흐름을 대할 것인가?
삶은 흰 망아지가 틈을 지나는 순간처럼 짧은가?
한 생이 문틈으로 스치는 그림자처럼 짧다면, 그 찰나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삶과 죽음은 낮과 밤이 갈마드는 것과 같은가?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것이 낮이 밤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자연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할 까닭이 있는가?
천지보다 먼저 있은 것이 있는가 — 시간에 시작이 있는가?
하늘과 땅보다 앞선 무엇이 있다면, 시간은 어디서 시작되며 그 이전은 무엇인가?
시간은 밖의 실재인가, 우리 감성의 형식인가?
시간은 세계가 우리와 무관하게 지닌 성질인가, 우리가 세계를 겪기 위해 끼고 있는 안경인가?
절대 시간은 스스로 균일하게 흐르는가?
시간은 그 안의 어떤 사건과도 무관하게, 텅 빈 채로도 홀로 흐르는가?
시간은 사물 없이 존재하는가, 사건들의 순서일 뿐인가?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텅 빈 시간이 그래도 흐른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영원이란 무한한 생명을 한꺼번에 온전히 소유함인가?
영원은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인가, 아니면 시간 밖에서 모든 때를 한꺼번에 보는 것인가?
우리는 결코 현재를 살지 않고 과거와 미래만 사는가?
지난 일을 곱씹고 올 일을 앞당겨 걱정하느라, 우리는 유일하게 존재하는 지금을 놓치고 있는가?
세상이 있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시간이 세계와 함께 생긴 것이라면, "세계 이전"이라는 시간을 묻는 것은 애초에 뜻이 있는 물음인가?
우리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른가?
고통 속에서 삶이 이토록 빨리 지나간다면, 이 짧고 힘겨운 날들을 어떻게 견디고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세월은 나를 기다려 주는가?
세월이 나를 기다리지 않고 흘러간다면, 나는 미루던 일을 언제 시작할 것인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우리가 진정 가진 유일한 것이 시간이라면, 나는 그것을 누구에게 빼앗기고 있으며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사랑은 결핍인가, 넘침인가?
사랑은 내게 없는 것을 향한 결핍의 갈망인가, 아니면 넘쳐서 건네는 것인가?
인(仁)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가?
인(仁)이란, 결국 사람을 사랑하는 그 한마디로 다 담기는가?
사랑은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일인가?
사랑은 원래 하나였다가 갈라진 반쪽을 다시 찾는 그리움인가?
사랑은 무엇을 견디는가?
사랑은 감정이 식은 자리에서도 견디는 힘으로 남는가, 아니면 견딜 수 없을 때 끝나는가?
사랑은 어디까지 오를 수 있는가?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은 더 큰 아름다움을 향한 사다리의 첫 계단일 뿐인가?
내 사랑이 나를 어디로 끌어가는가?
사람은 결국 자기가 사랑하는 것 쪽으로 무게처럼 이끌려 가는가?
사랑에는 고귀한 사랑과 천한 사랑이 따로 있는가?
몸을 향한 사랑과 영혼을 향한 사랑은 서로 다른 사랑인가, 아니면 한 사랑의 두 얼굴인가?
사랑은 왜 달면서 동시에 쓴가?
사랑은 왜 기쁨과 아픔을 한 몸에 담고 오는가?
그리움은 왜 잠 못 이루게 하는가?
이루지 못한 그리움은 왜 우리를 밤새 뒤척이게 하는가?
사랑받으려면 먼저 사랑해야 하는가?
사랑은 받으려 애쓰는 일인가, 아니면 먼저 주는 데서 시작되는 일인가?
사랑은 죽음만큼 강한가?
사랑은 정말 죽음에 맞설 만큼 강한가, 아니면 죽음 앞에서 가장 무력해지는가?
어진 사람만이 참으로 사랑하고 미워할 수 있는가?
사사로움을 넘어선 사람만이 누군가를 참되게 사랑하고 미워할 자격이 있는가?
첫눈에 반한 사랑은 어떻게 한 삶을 바꾸는가?
한 사람을 처음 본 순간의 사랑이 어떻게 평생의 방향을 정할 수 있는가?
사랑은 무엇을 세우는가?
사랑은 느끼는 감정인가, 아니면 상대 안에 무언가를 세우는 행위인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사랑인가, 병인가?
아무리 곁에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 갈망은 사랑의 증거인가, 사랑의 함정인가?
자애로움이 왜 첫 번째 보물인가?
부드러운 자애로움이 어떻게 가장 강한 힘이 될 수 있는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멀리 있는 인류를 사랑한다면서, 나는 곁의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사랑은 신이 준 광기인가?
이성을 잃게 만드는 사랑의 광기는 병인가, 아니면 가장 높은 축복인가?
지극한 사랑에는 편애가 없는가?
누구도 특별히 편애하지 않는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인가, 아니면 사랑이 아닌가?
깊이 이해하는 것이 곧 사랑인가?
어떤 대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 그것을 사랑하는 일과 같은 것인가?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나은가?
사랑의 참된 자리는 사랑받는 쪽인가, 사랑하는 쪽인가?
나는 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겉모습인가, 그 안의 사람됨인가?
가슴은 이성이 모르는 이유를 아는가?
사랑은 이유를 댈 수 없어도 옳은가, 아니면 이유 없는 사랑은 미덥지 못한가?
마음은 무엇을 사랑해야 쉬는가?
마음의 끝없는 갈증은, 무엇을 사랑해야 비로소 가라앉는가?
사랑은 가까운 데서 시작해 번져야 하는가?
참된 사랑은 가장 가까운 데서 시작해 물결처럼 번져가는가?
사랑이 온 우주를 움직이는가?
사랑은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을 넘어, 세계를 돌게 하는 근본 힘인가?
사랑도 배울 수 있는 기술인가?
사랑은 저절로 찾아오는 운명인가,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기술인가?
사랑은 왜 몸을 이토록 흔드는가?
사랑은 왜 마음의 일이면서 동시에 온몸을 무너뜨리는 몸의 사건인가?
사랑은 상대의 좋음을 바라는 것인가?
사랑은 내가 느끼는 감정인가, 상대의 좋음을 바라는 의지인가?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는가?
사랑은 정말 모든 것을 이기는가, 아니면 우리가 사랑에 지고 마는 것인가?
삶은 끝나기 전에는 행복을 논할 수 없는가?
한 삶이 행복했는지는, 그 삶이 다 끝난 뒤에야 말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이 헛되다면, 그래도 무엇이 남는가?
해 아래 모든 것이 한 줌 입김처럼 사라진다면, 그래도 붙들 만한 것은 무엇인가?
잘 산 삶이란 무엇인가?
잘 산 삶이란 무엇을 가진 삶인가, 아니면 무엇을 하며 산 삶인가?
인간은 왜 갈대이면서 우주보다 큰가?
한 번의 바람에도 꺾이는 인간이, 어떻게 자기를 꺾는 우주보다 큰 존재일 수 있는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몸은 사라져도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덕인가 업적인가 말인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면, 그 사이는 무엇인가?
흙에서 와 흙으로 돌아가는 그 짧은 사이에,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땔감은 다 타도 불은 이어지는가?
내 몸은 타서 사라져도, 내가 지핀 불은 다른 이에게 옮겨 이어지는가?
내가 세운 것 중 청동보다 오래 남을 것은 무엇인가?
무너지는 청동과 돌이 아니라, 시간을 견디고 남는 것을 나는 무엇으로 세우는가?
무엇을 깨달으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가?
단 하루라도 참을 깨달았다면, 그 삶은 짧아도 충분한가?
기억하는 자도 기억되는 자도 사라진다면, 명예는 무엇인가?
나를 기억할 사람들마저 언젠가 사라진다면, 이름을 남기려는 노력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한 삶이 거두는 참된 수확은 무엇인가?
나이 들어 돌아볼 때, 재산도 명예도 아니라면 무엇이 참된 수확으로 남는가?
곧 모든 것을 잊을 텐데,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도 모든 것을 잊고 모두에게 잊힐 텐데, 그래도 지금 옳은 일을 할 이유는 무엇인가?
온 세상의 명성도 우주에서는 한 점인가?
우주에서 내려다보면 티끌만 한 이 땅에서, 명성을 다투는 일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 왜 그 말이 선해지는가?
죽음이 가까울수록 사람의 말이 진실해진다면, 나는 지금 왜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면, 그 사이에 쥔 것은 무엇인가?
가진 모든 것이 결국 내 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무엇을 잃은 것이며 무엇을 지녔던 것인가?
삶은 얼마나 긴가가 아니라 얼마나 좋은가로 재는가?
한 삶의 값어치는 그 길이에 있는가, 아니면 그것이 얼마나 잘 살아졌는가에 있는가?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것은 무정함인가, 통달인가?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서 노래한다면, 그것은 매정함인가 삶과 죽음을 꿰뚫은 눈인가?
잃었다고 할 것인가, 돌려주었다고 할 것인가?
떠나보낸 것을 잃은 것으로 볼 것인가, 잠시 맡았다 돌려준 것으로 볼 것인가?
흐르는 물은 왜 웅덩이를 다 채우고서야 나아가는가?
참된 이룸에는 건너뛸 수 없는 순서가 있어, 웅덩이를 다 채우고서야 나아가는가?
운명이 다 앗아가도 남는 참된 좋음은 있는가?
부와 명예와 권력이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돌고 돈다면, 그 바퀴 밖에 남는 참된 좋음은 있는가?
마지막 길에 지니고 갈 참된 치장은 무엇인가?
삶의 마지막에 지니고 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재물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는가인가?
한 삶이 맺는 참된 열매는 무엇인가?
한 삶이 끝에 맺는 열매는 쌓아 올린 것인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인가?
세상의 영광이 이토록 빨리 지나간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이 주는 영광이 이토록 덧없이 지나간다면, 지나가지 않는 것을 나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사라진 것을 슬퍼하기보다 있었음을 감사할 수 있는가?
떠나간 것을 잃었다고 슬퍼하는 대신, 그것이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는가?
나는 내가 사랑한 것으로 빚어지는가?
나 자신을 향한 사랑과 나를 넘어선 것을 향한 사랑 중, 나는 무엇으로 지어지고 있는가?
떠난 이는 남은 이의 기억 속에 사는가?
몸이 사라진 뒤에도, 사람은 남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다시 사는가?
죽음이 지우지 못할 삶의 의미가 있는가?
나를 기다리는 죽음이 모든 것을 지운다면, 그래도 지워지지 않을 삶의 의미가 있는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몸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 사라지지 않음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좋은 이름은 재물보다 오래 남는가?
남기고 갈 것이 재물과 이름 중 하나라면, 무엇이 더 오래 남을 것을 택하는 것인가?
모든 것을 다 들은 뒤, 결국 남는 결론은 무엇인가?
삶의 모든 물음을 다 통과한 끝에, 우리에게 남는 단 하나의 결론이 있다면 무엇인가?
필멸의 인간은 무엇을 낳아 영원에 닿는가?
사랑하기에 낳고 남기는 것 — 그것이 필멸의 인간이 영원에 닿는 유일한 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