溫故知新 옛 가르침에서 오늘의 깨달음, 온고
나는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에 끝이 있는가, 아니면 세는 것을 멈추는 데서 용서가 시작되는가?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하라.
베드로가 물었다. "형제가 내게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됩니까?" 당시 랍비들은 세 번이면 충분하다 여겼으니, 일곱 번은 이미 넉넉한 셈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라 답했다 — 이는 490번을 세라는 뜻이 아니라, 용서에 숫자를 매기려는 마음 자체를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세기를 멈추는 데서 용서가 시작된다. 이 물음은 갈라졌다. 스토아는 남의 잘못이 무지에서 나온 것이니 화낼 일이 아니라 이해할 일이라 했고, 불교는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면 끝나지 않는다며 놓음을 가르쳤다. 그러나 근대의 정의론은 반문한다 — 무한한 용서는 불의를 눈감는 것이 되지 않는가? 용서와 정의는 어디서 만나는가.
상처의 기록이 지워지지 않고 쌓이기 쉬운 시대에, 세기를 멈추라는 이 물음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나도 이 물음 앞에 서서
나는 용서를 셈으로 한다. "이번이 세 번째야", "한 번만 더 그러면" — 마음속에 장부를 두고 눈금을 매긴다. 예수의 답은 그 장부 자체를 덮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무한히 용서하라는 말이 때로 계속 상처받으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쩌면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기 전에, 원한의 장부를 든 나 자신을 그 무게에서 풀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세기를 멈추지 못한 채, 내 마음속 장부 하나를 조용히 들여다본다.
✍️당신의 답
옛사람들의 계보는 여기서 끝납니다. 이제 이 물음 앞에 당신이 섭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 오늘의 당신이 어떻게 답하는지만 남기세요.
🔒 이 답은 당신의 기기에만 저장됩니다. 서버로 전송되지 않아요.
이곳은 답의 박물관이 아니라 물음의 계보입니다. 원전은 모두 고대·근대 문헌(Public Domain)이며, 계보와 해석은 ONGO 100% 오리지널입니다.